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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삶의 균형’ 신화의 허구
by Denise Yohn
2022-08-06
가시덤불과 엉겅퀴_신앙과 일의 통합을 추구하며 고민하는 이들에게 현장의 조언을 들려드립니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창세기 3:18 지금까지 받은 일과 삶의 균형을 잡으라는 조언 중 최고는 어떤 것인가? 많은 사람이 과로에 시달리고 새로운 업무와 집안일 사이를 곡예를 하듯 오가며 해내야 하는 오늘날의 직업 환경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잡고자 하는 노력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내가 30년이 넘게 직장 생활하면서 깨달은 것은 일과 삶의 균형은 그저 신화일 뿐이라는 것이다. “균형”은 안정된 상태를 의미하지만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은 삶의 반대 개념이 아니다. 일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삶의 필수 요소이다. 적어도 그렇게 여겨야 할 영역이다. 따라서 일과 삶의 균형은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려고 애쓰는 대신에 ‘중심’을 추구하기로 했다. 나는 나의 삶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그다음에 삶의 다른 부분들을 계획하고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 결심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이미 모든 것의 중심이시다. 만물의 주이시며 알파와 오메가이시고 성경과 이 세상의 주역이시다.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나 자신이 삶의 중심인 것처럼 살아갈 때가 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자신의 삶이 엉망이 되어버렸다는 걸 깨닫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이 중심이시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우리 삶의 중심이신 예수님을 기준으로 삶의 우선순위들을 계발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다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나의 삶을 예수님 중심으로 맞추기 위해 내가 실천하는 몇 가지 방법이다.1. 자기 자신에게 복음을 선포하라.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이루신 일을 받아들여야 하고, 이것이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역의 성취임을 이해해야 한다.그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의를 확보하셨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대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의 선물에 대한 감사, 사랑 많으신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려는 자녀로서 갖는 진실한 소망 가운데서 자유롭게 무엇이든 하면 된다.따라서 우리는 꾸준히 우리 자신에게 복음을 선포할 필요가 있다. 잭 밀러가 말했듯이 복음은 한번 듣고 믿은 후에 우리의 노력과 의지에서 비롯한 어떤 일을 하기 위한 메시지가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복음을 따르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2. 삶의 목적과 가치를 분명히 하라.기업에서 성취하고자 하는 것과 그 방법을 압축하여 핵심 가치를 만들고 비전선언문을 세우는 것처럼 목적과 가치를 분명히 하는 것은 삶을 제대로 살아가는 데 유용하다.목적과 가치를 발견하는 일은 기도와 깊은 묵상에서 비롯한다. 기도와 묵상 가운데서 목적과 가치를 발견했다면, 그것을 적어서 당신의 시간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와 보낼지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데 사용하길 바란다.나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 나는 사업가들이 자신의 직업 소명을 충실히 이행하는 일을 돕고 있다.” 이는 내가 하는 일이 사업가들이 직장에서 소명을 분별하고 그 소명을 이행하도록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콘퍼런스에서 기업의 지도자들에게 이야기할 때도, 내가 이끄는 부서의 젊은 전문가들을 가르칠 때도 항상 이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나의 핵심 가치 중 하나는 “단순한 생산성보다는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핵심 가치를 마음에 새김으로써 해야 할 일 목록을 확인하는 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내가 관심을 기울이기를 원하시는 사람들과 일들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노력한다. 이것은 때로는 내가 계획한 모든 일을 성취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때로는 내가 계획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중심에 놓는 삶의 실천으로 나를 이끈다.3. 직장 내 업무가 돌아가는 주기를 파악하고 계획하라. 불가피하게 더 오랜 시간 일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직장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능하다면 다음에 해야 할 업무까지도 명확하게 해 놓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다른 이들에게 기대기도 하고 우리가 맡게 될 추가적인 책임도 피하면서 직장이 아닌 다른 삶의 영역을 위한 계획도 적절하게 세울 수 있게 된다.그러나 이것은 일정 기간만 지속해야 한다. 과중해진 업무량은 줄 때도 있어야 하며 휴식과 다른 우선순위를 위한 시간이 끼어들 수도 있어야 한다. 나의 직장이 이러한 시간 리듬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다른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처음에 언급한 두 가지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예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지 않으면 우리는 항상 수백만 가지 길로 끌려다닐 것이고, 저마다 먼저 해 주길 기다리는 일들 속에서 방향을 잃은 채 힘들어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중심에 모실 때, 우리는 집중과 쉼을 경험하게 된다.원제: Debunking the ‘Work and Life Balancing’ Myth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일과삶의균형
일터신학
일과삶
워라벨
아이들에게 일의 미덕을 가르치는 작은 일과 25가지
by Sarah Eekhoff Zylstra
2022-06-07
지난 주말, 우리 가족 넷이서 차고 대청소를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과였다. 확실히 해 두자. 차고 청소는 끔찍한 일일 때가 더 많다. 갓난아기나 말썽꾸러기를 데리고 이 일을 한다면, 느긋하지 못하다면, 이 일은 이내 우리를 좌절시키거나 소리 지르거나 포기하게 만든다. 사실 남편과 나는 이런 일은 혼자서 처리하는 편이 더 낫다는 걸,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게 될 잔소리를 안 하게 된다는 걸 겪어 봐서 안다. 하지만 지난 주말, 우리 넷은 두 시간 동안 쓸고 닦고 정돈하는 일을 함께 했다. 어지럽게 널려 있던 것들을 가지런하게 질서를 잡아 준 시간이었을 뿐 아니라 함께하는 달콤한 만족의 시간이었다. 우리에게 맡겨 주신 창조세계의 작은 영역을 제자리로 회복하고 되돌려 놓아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내 친구는 이 일을 얼마나 노련하게 하냐면, 가끔 토요일 아침에 이웃 아이들이 그 집에 와서 대청소를 돕기도 한다. 농담이 아니다.)우리가 기도하고 인내하며 아이들과 함께 일을 할 때면, 굳이 우리가 하는 일의 선함을 설명해 줄 필요도 없다. 그만큼 자명한 사실이다. 그래도 때로는 적절한 때에 아이들에게 설명을 곁들이면 일의 영광스러운 선하심을 아이들과 우리가 깨닫게 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다음 몇 가지 아이디어를 갖고 시작해 보길 바란다. 1. 신발 정리. 우리에게 신발을 주시고, 두 발을 주시고, 걷고 뛰고 춤추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2. 장난감 정돈. 놀이를 하면서, 상상 속에서, 그리고 친구들과 이런저런 역할놀이를 하면서 배우게 되는 모든 것에 기뻐하라. 그리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심에 기뻐하고, 또 우리가 우리 공간을 질서 있게 정리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낸다는 사실에 기뻐하라. 3. 쓰레기 내다놓기. 우리 삶에서 먼지와 쓰레기와 죄는 정기적으로 내다버려야 한다는 것을 서로에게 일깨워 주라.4. 식탁 차리기.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가족과 함께 나눌 시간을 기대하며 즐거워하라.5. 식탁 치우기.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성실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6. 굽도리 먼지 훔치기. 먼지를 털어내는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굽도리도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증명한다. 집처럼 느끼게 해 주는 장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쨌든 이것도 주신다. 감사 드려라.7, 엎지른 물 닦기. 엎지른 사람은 당황하고 좌절하고, 부모는 짜증이 나고, 그걸 목격한 형제는 우쭐할 수 있다. 여유를 가지고, 그 상황 가운데 있는 각 사람의 잘못된 태도를 바로 잡고, 터놓고 사과하고, 죄 용서 받은 은혜를 따라하고 흘린 물을 닦아라.8. 식기 세척하기. 복잡한 기술로 구현된 가전제품으로 일상생활에서 많은 부담을 덜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9. 식료품 나르기. 농부부터 택배기사와 마트 직원까지, 우리에게 영양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모든 이에게 감사하라.10. 이불 개기.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왜 침대를 정리해야 하지? 밤이면 다시 헤집어놓을 자리를 왜? 아마도 가장 좋은 대답은 이걸 거다. 때로는 이해하거나 동의하지 않아도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침대 좀 정리해 달라고 부탁한 사람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11, 침대 밑 청소하기. 어둠 속에 있는 것을 밝은 데로 끌어내야만 그게 뭔지, 쓸 만한 건지 제대로 알 수 있다.12. 세탁 옷 개기.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첫 번째 물질 선물은 옷이었다. 옷으로 덮지 않으면, 털 없는 우리는 얼어 죽을 것이다. 하나님의 후하심에 기뻐하라. 우리가 매일 다른 색과 다른 스타일을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이시다! 13. 풀 뽑기. 친구 관계, 학업, 영성 훈련에서, 또는 우리가 시간을 보내는 방식에서 어떤 풀이 자라고 있는지 잘 살펴보라. 뽑아 버릴 걸 골라내라.14. 세차. 집 청소가 힘든 대공사라면, 세차는 가족에게 깔끔한 공간을 제공하는 보다 빠른 방법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해 내셨는지, 또 잘 정돈된 공간에 있는 기분이 어떤지 얘기 나누라.15. 반려동물 돌보기.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동물들을 돌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가. 하나님을 찬양하라!16. 바닥 쓸기. 바닥에 넘어지면(the fall, ‘낙반’과 ‘타락’의 중의적 표현-역주), 어떻게 되는지 명심하고, 우리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17. 화장실 수건 걸기. 우리 신체에 필요한 것들을 잘 살피는 일을 함으로써 청지기의 섬김의 연습하라. 18. 화초 물주기. 이파리와 꽃의 아름다움, 뿌리가 뻗어 나가는 복잡한 시스템,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다시 산소로 바꾸시려고 식물을 완벽하게 설계하신 방식에 존경을 표하라.19. 설거지. 아이와 함께 이 일을 할 때 (또는 아이들이 저희끼리 이 일을 함께 할 때) 대화를 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생긴다. 비누와 물은 우리 죄가 말끔히 씻긴 생생한 예시가 된다. 그러나 설거지를 하면서 얻는 더 큰 선물은 함께하는 느린 시간이다. 서두르지 마라.20. 낙엽 쓸기, 눈 치우기, 잔디 깎기. 창조세계의 축복에 대해, 그리고 창조세계를 돌보는 우리의 책임에 대해 토론하라.21. 간단한 한 끼 준비하기. 우리는 규칙적으로 음식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가 영적 영양분을 얻기 위해 어떻게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22. 쿠키 굽기. 더욱 풍성하게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끼 음식을 주시고, 더하여 디저트도 주신다! 하나님의 친절하심을 맛보라.23. 화장실 청소. 우리를 병들게 하는 세균을 없애는 전쟁을 벌이라. (나에게 처음 이 주제를 짚어준 이는 짐 멀린스이다. 그는 허드렛일의 가치를 깊이 다룬 글을 썼다.)24. 어린 동생들 돌보기. 기억하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각자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나이 많은 형제를 통해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25. 개 산책시키기. 하나님께서 겹겹이 주시는 선물에 기뻐하라. 창조세계에 거하면서, 반려견과 함께 운동하면서, 이웃과 대화하는 기회를 한꺼번에 누리라. 원제: 25 Chores to Teach Kids About the Goodness of Wor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노동윤리
허드렛일
혼돈과질서
여성으로서 일하며 배운 노동의 소명과 도전
by Clarissa Moll
2022-04-18
지난 가을 미국 통계청은 냉정한 현실을 보여 주는 통계를 발표했다. 이 통계와 관련하여 AP통신은 이렇게 보도했다. “2020년 봄 팬데믹이 발생한 후에 취학 연령의 자녀를 둔 여성 약 350만 명이 직장을 잃거나 휴직을 하거나 사직을 했다.” 그동안 일을 계속 이어갔던 여성들도 있었지만, 직장을 잃은 여성들은 자신의 노동이 어떠해야 하는지 팬데믹을 겪으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떤 여성은 하루 종일 온라인으로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붙잡혀 있다며 한탄했다. 책임을 분담하면 기대치 않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여성도 있었다.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은 당연히 휴가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집에 있는 엄마는 휴가를 가질 수 없다. 사실 가사 노동도 까다롭기는 직장에서 하는 일과 마찬가지다.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내가 직접 배운 바다.17년 전에 나는 임신 7개월의 몸으로 학위를 받으러 졸업식장을 걸어가면서 앞으로 육아와 함께 박사 학위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사랑스러운 딸의 두 눈을 바라보면서 딸아이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 안에서 경쟁하고 있는 두 가지 열정을 보게 되었다. 한 편으로는 엄마가 되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무엇이건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고 싶었다. 결국 나는 추가적인 학업은 중단하고, 그저 내 능력을 유지시켜 줄 수 있을 정도의 직장에 계약직으로 취직했다. 동시에 할 수 있는 대로 엄마로서의 삶도 살아내려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또래의 여성들이 이뤄내는 성과를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가정에서 아이 넷과 함께하는 일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의 작은 마음들을 빚어내고 기르는 것의 고귀함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지난 8년간 아이들과 홈스쿨링을 했다.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새로운 것을 궁금해 하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길러 주려고 노력했다. 아이들을 위해 4H클럽과 야구클럽에서 자원봉사도 했다. 그러면서 내가 그동안 직장에서 익혔던 실력들을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방식으로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참으로 많은 선한 일을 하셨다. 그리고 내가 가장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던 바로 그 때에 남편이 갑자기 하늘나라로 돌아갔다.가정을 홀로 짊어지게 되면서 나는 마지못해 생계도 책임져야 했다. 나는 일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의 권리나 가치를 평가절하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생계를 꾸려가기 위한 노동을 억지로 떠맡고 있는 것은 그것이 결코 내가 계획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단 한 번도 아이 넷을 키우는 가정의 생계를 홀로 꾸려가는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엄마로서의 삶과 한부모의 책임을 함께 짊어지는 삶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직장으로 돌아간 후 고통 속에서 발견한 지혜를 통해, 나는 더러운 식기와 세탁물로 씨름하던 가사 노동의 고귀함을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매일 아침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간의 노동과 번영에 대한 하나님의 진리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세탁실에서 가사 노동을 하고 있건, 사무실에 앉아 있건, 이 글은 읽은 이들에게도 노동에 대한 다음의 교훈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다양한 직업, 하나의 부르심성경은 분명히 여자도 남자와 동일한 부르심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이 말씀을 생각하면 남자의 세계, 또는 남자의 기업 세계(corporate world)는 없다. 오직 하나님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부르심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우리 모두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팀 켈러는 ‘일과 영성’에서 우리 노동은 모두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운송수단”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일은 우리가 교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될 수 있는 기회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기회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이 동일한 부르심을 이해할 수 있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기쁨과 목적을 가지고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에 궁극적인 보상을 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명령에 순종하는 우리에게 영원한 상급으로 갚아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가진 직업은 다양할 것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부르심을 받았다. 원격으로 일하기내가 성장한 세상에서는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의 열정을 높게 평가했다. 그런데 내가 다닌 교회에서는 가정에서 일하는 여성을 더 칭찬했다. 나는 이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는 압박을 거듭해서 받았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에게 노트북, 핸드폰, 줌이 생겼고, 이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지난 몇 년 재택근무를 하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일하는 장소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일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어디에서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성실하게 해내면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 곳에만 있지 않다. 재난이 우리의 우선순위를 재설정하고 우리의 비전을 명확하게 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지난 한 해, 팬데믹을 겪으면서 우리는 하찮게 여겨왔던 직업들의 가치를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다. 국가는 “필수 직종”(essential services)을 지정하는 협상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이 그동안 환자와 취약계층을 돌보던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동안 작고 보잘 것 없다고 여겼던 일들이 인류 번영과 공공선에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아마도 우리에게 이러한 방향전환이 필요했던 것 같다. 서로 끝없이 경쟁해야만 하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양한 여성들을 다양한 자리로 부르셔서 당신을 섬기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서 일하는 우리의 모든 노동은 가치가 있다. 어떠한 일터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일할 수 있다.열매 맺는 노동직장에 복귀한 후에 나는 엄마로서의 삶을 통하여 개발한 능력들을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다. 수년 동안 어린아이들의 끝없는 질문들에 답하면서 개발한 너그러운 마음은 직장에서 동료들의 짜증나는 이메일에 응대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다. 또한 매일 아이들을 방과후학교에 데려다 주었던 반복되는 일상은 매일 똑같은 프로젝트를 감당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엄마의 삶을 시작하면서 내 능력이 퇴보하고 녹슬게 될 것이라 걱정했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나를 집에서만 일하도록 훈련시키지 않으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직장과 가정에서, 내 모든 삶의 노동을 통하여 당신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이 세상에서는 어떤 직업은 다른 직업보다 더 가치 있다고, 또는 더 가치가 없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일터에서 하는 아주 사소한 일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한 잔의 냉수가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이 될 수 있다(마 10:42). 죽음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신실한 노동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고전 15). 우리가 노동을 이렇게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몸에 여러 지체가 있듯이,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른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모두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하다. 어린아이들이 하는 일의 성과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부모로서 우리가 하는 노동의 성과는 많은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투자한 만큼 성과가 나오는지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기대한 대로 성과를 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이 지금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 모든 결과가 나 혼자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주권과 우리의 신실한 노동이 함께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 각자가 하는 일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팀 켈러는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시고 성령께서 빚으신 우리의 이러한 노동은 항상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예배가 될 것이다. 원제: The Call and Challenge of Women’s Wor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박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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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e Carter
2022-04-04
편집자 주: 교회 지도자들은 “그 성읍의 평안”(렘 29:7)을 위하여 노력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경제가 우리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며, 교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를 위한 경제학’ 시리즈는 경제 신학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시리즈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경제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제공하여 믿음의 공동체가 경제와 공공 정책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2016년 미국 민주당은 최저임금을 시간당 15달러로 인상하고자 하는 요구를 당론의 일환으로 채택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제안을 새로운 1조 9,000억 달러 규모의 코로나19 구제 계획의 일부로 포함하고 있다. 지난해 1월 26일, 하원과 상원에서 민주당원들은 연방 최저 임금을 시간당 15달러로 인상하는 법안을 재상정하였다. 2025년까지 단계적으로 임금을 인상하자는 제안이다.최저임금은 고용주가 근로자에게 지급할 수 있는 최저 시급이다. 공정노동기준법(FLSA)에 따르면 이 법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에 대한 연방 최저 임금은 시간당 7.25달러이다. 많은 주 정부 역시 최저임금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근로자가 각 주 및 연방 정부의 최저임금법이 적용될 경우 근로자는 더 높은 최저 임금을 받을 수 있다.이러한 증가가 사람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도와줄 수 있을까? 이러한 임금 인상은 실업률을 증가시키는가? 비록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이 최초의 연방 최저임금을 도입한 1938년 이후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였지만, 최저임금법이 노동자들에게 과연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진정으로 이해하는 미국인은 거의 없다.최저임금법이나 인상안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근로 빈곤층을 돕는다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 양측 모두 고결한 의도가 있기 때문에 최저임금법과 최저임금 인상 논의의 장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가 되기보다는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경험상의 증거에 근거해 그리스도인은 판단해야 한다. 다른 이해당사자들의 관심도 고려해야 하지만 잠언 22:22에서 말해주듯 우리의 제일 관심사는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라”는 것이어야 한다.교회 지도자들이 이 문제와 그것이 근로 빈곤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더 잘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여기 최저임금에 대해 알아야 할 명백한 열 가지 내용이 있다.1.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주된 주장은 그것이 노동자의 노동 가치를 높인다는 것이다.노동의 임금 효율성 이론은 높은 임금이 노동자의 이직률과 신규 노동자를 고용하고 훈련하는 관련 비용을 감소시키고, 노동자가 노조에 가입하도록 하는 동기를 줄이며, 해고에 따른 기회비용이 증가하기 때문에 노동 생산성이 향상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시각에서 임금을 최저임금 수준까지 소폭 인상한다고 하더라도 고용에 악영향은 없을 것이다.임금을 더 많이 지급하면 근로자 만족도가 높아져 이직률이 떨어진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종 업종들 사이에 가격 차이가 있을 때만 적용될 수 있는 가정이다. 아메리칸 이글(American Eagle)에서 시간당 7.25달러를 받고 일하는 것과 갭(GAP)에서 10달러를 받고 일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더 높은 임금을 위해 스웨터를 접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더 높은 임금을 지급하는 고용주에게 (자신들이 더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면) 더 강도 높게 일할 의향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쇼핑몰에 있는 모든 상점이 (그리고 그 지역의 다른 모든 업종이) 시간당 10달러를 지급해야 한다면, 직업을 바꾸겠다는 결정은 주로 비금전적인 요인에 근거하게 된다.최저임금 인상 논의에서 종종 간과되는 요소가 또 있다. 시간당 임금의 차이 때문에, 갭(GAP)은 고용에 있어서 더 까다로울 수 있다. 높은 최저 임금을 제공하려는 갭의 의지는 더 많은 지원자를 불러 모을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고용주들보다 유리하다. 갭의 매장 매니저들이 무능하지 않다면, 진정으로 시간당 10달러의 노동 가치가 있는 사람들만을 고용할 것이다. 다시 말해, 갭은 기꺼이 지급할 수 있는 금액에 합당한 사람을 채용하게 될 것이다.이것이 최저임금제에 반대하는 일부 부류가 정부의 강제 조치는 효율성 이론의 효과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일자리를 죽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비용을 더 지급하겠다는 기업은 고용에서의 우위를 상실할 뿐만 아니라 비용을 더 지급할 의사가 없는 기업들은 최저임금보다 노동력의 가치가 없는 사람들은 해고하든지 또는 그러한 사람들은 고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다른 요인에 따라 이직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절대 고용되지 않을 사람들(저숙련 노동자, 새로운 이민자)은 노동시장에서 완전히 배제될 것이다.2.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근본적인 주장은 그것이 낮은 기술력의 사람들을 차별한다는 것이다.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최저임금을 “고용주들이 낮은 기술력을 보유한 사람들을 차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요건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안토니 데이비스(Anthony Davies)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최저임금은 고용주가 숙련도가 낮고 교육이나 경험이 낮은 노동자를 고용하고자 하는 모험을 기피하게 함으로 이런 사람들의 노동시장 참여를 막는다. 다시 말해, 근로자들은 교육, 기술, 경험, 그리고 가격을 기준으로 일자리를 얻기 위해 경쟁한다. 이러한 요인 중, 교육 수준이 낮고, 숙련도가 낮고, 경험이 적은 근로자들이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가격(임금)이다.지난해 1월, 국립경제연구소는 연구 문헌들을 검토하여 최저임금법의 효과에 대한 조사 결과를 요약한 논문을 발표했다. 저자들의 주요 결론은 다음과 같다.• 문헌에는 부정적 추정치가 분명하게 더 우세하다.• 이 결과들은 십 대나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교육을 많이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더 확실하다.•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에 대한 연구로부터 나온 결과는 부정적 고용 효과를 훨씬 더 강력하게 지적한다.• 저임금 산업에 대한 연구로부터 나온 결과들은 덜 편파적이다.저자들은 경험에 근거한 결과 대부분이 최저임금이 저숙련 고용을 감소시킨다고 결론짓는다. 또한 “연구의 반대 결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왜 대부분의 연구가 잘못된 지를 설명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덧붙인다.3. 최저임금 소폭 인상의 효과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이견을 보인다.최저임금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과 최저임금 근로자들의 생활수준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이견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견의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적은 증가(20% 미만)에 대한 것이다. 현행 연방 최저 임금(7.25달러)이 20퍼센트 인상되면 시간당 8.70달러가 된다. 시간당 15달러로 인상되면 108퍼센트의 인상이 될 것이다.거의 모든 경제학자는 최저임금의 대폭적인 인상이나 이를 “생활임금”(시간당 12달러에서 15달러)에 맞추려는 시도가 실업률의 대폭적인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 2019년에 실시된 경제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2/3 이상(88%)이 연방 최저 임금은 15달러 미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74퍼센트가 15달러로 인상하는 것에 반대했다(강력 반대 61%, 다소 반대 13%).대부분의 경제전문가는 최저임금이 15달러가 된다면 청년 고용 수준(84%), 가용 일자리 수(77%), 성인 고용 수준(56%)에 악영향을 끼치리라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임금 15달러가 신입직의 숙련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질문에 5명 중 4명(83%)은 고용주가 더 좋은 기술력을 보유한 신입직을 채용할 것이라고 답했다.경제학자들은 15달러의 최저 임금이 빈곤율에 도움이 될지 해가 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3분의 1(38%)은 임금 인상이 빈곤율 증가로 이어지리라 생각하는 반면, 27퍼센트는 감소하리라 생각하고 있으며, 19퍼센트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답했으며, 16퍼센트는 잘 모르겠다고 답변했다. 5명 중 2명(39%)은 최저임금을 7.25달러로 유지하거나 낮춰야 한다고 생각했고, 3분의 2(66%)는 최저임금이 시간당 10달러 이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되기 전, 의회 예산처는 국가 최저임금이 시간당 15달러로 인상될 경우 실업률이 130만 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산했다.4. 최저임금이 빈곤 임금, 생활 임금, 가족생활 임금과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최저임금이 올라가면 빈곤 임금, 생활 임금, 심지어 가족생활 임금 수준까지 오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쟁과 혼란이 있다. 이 세 가지 관련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빈곤 임금은 개인이나 가족을 빈곤층 수준 이상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생활 임금은 개인이 최소한의 음식, 건강보험, 주거, 교통, 그리고 다른 기본적인 필수품(의류, 개인 관리 물품)을 충당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가족생활 임금은 4인 가족(일하는 성인 1명, 일하지 않는 성인 1명, 자녀 2명)이 생활하는 데에 필요한 ‘생활임금’이다.생활 임금과 가족생활 임금은 지역적 차이를 보인다. 댈러스와 샌프란시스코를 대표적인 도시로 예를 삼아 보면 댈러스는 5만 2,210달러가 중간 가구소득이지만 샌프란시스코는 9만 6,265달러이다.시간당 빈곤 임금은 두 도시가 같다: 개인당 6달러, 4인 가족당 12.38달러. 그러나 댈러스의 생활임금은 개인이 12.38달러, 4인 가족이 26.76달러이지만 샌프란시스코는 각각 20.82달러와 59.86달러이다.최저임금이 15달러이면 댈러스에서 생활임금으로는 충분하지만,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턱없이 부족하다.생활임금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지역마다 비용이 다르기 때문에 연방 최저임금이 국가 생활임금을 결정하는 충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5. 최저임금의 인상은 빈곤율 감소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샌프란시스코 연방준비은행의 학자인 데이비드 뉴마크(David Neumark)는 수많은 연구가 최저임금 인상과 빈곤 감소 사이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관계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 발견은 직관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결국, 가난한 사람들이 낮은 임금을 받고 있다면, 그들의 임금을 올리는 것은 그들의 가난을 줄이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어느 정도,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놓치고 있는 사실은 최저임금이 소득이 낮은 가정이 아닌 저임금의 개별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최저임금을 버는 근로자 대부분이 고소득 가정에 속하기 때문이다.6. 최저임금은 저숙련 빈곤층에서 더 숙련된 노동 빈곤층과 중산층으로 부를 재분배한다.최저임금 인상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은 최저 임금 인상이 고용자와 투자자의 부를 근로자에게 이전할 것이라고 잘못 믿고 있다. 그러나 안토니 데이비스가 설명하듯이, 인상된 임금을 지불해야 할 비용은 적어도 네 곳 중 하나로부터 나와야 한다. 즉, 소비자로부터 더 높은 가격을 받던가, 투자자에 대한 수익을 줄이던가, 공급자로부터 더 낮은 가격에 공급받던가, 또는 노동력을 절감하여야 할 것이다. 실증연구 결과 최저임금 인상의 주요 효과는 근본적으로 덜 숙련된 노동 빈곤층의 (그들을 고용하지 않음으로 생기는) 부(富)가 숙련된 빈곤층이나 중산층 청소년으로 이전되는 것으로 나타났다.7. 최저 임금 인상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불균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16세에서 24세 사이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성들의 고용은 최저임금에 불균형적인 반응을 보인다. 최저임금이 10퍼센트 인상되면 16세에서 24세 사이 백인 남성의 고용은 2.5퍼센트, 히스패닉계 남성의 고용은 1.2퍼센트, 아프리카계 남성의 고용은 6.5퍼센트 줄어든다. 경제학자 윌리엄 이븐(William Even)과 데이빗 맥퍼슨(David Macpherson)은 “2007, 2008, 그리고 2009년 연방 최저임금의 인상을 직접적으로 영향 받은 21개 주에서, 경기침체의 거시 경제적 결과보다 최저임금 인상의 결과 때문에 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일자리를 더 많이 잃었다”고 추정했다.8. 최저임금을 실제로 버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간당 7.25달러 이하를 버는 근로자는 전체 시급 근로자의 1.9퍼센트를 차지한다. 시간당 임금을 받는 노동자 중 39만 2,000명은 시간당 7.25달러의 연방 최저임금을 정확히 벌었고 120만 명은 연방 최저 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았다.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연방 최저 임금 이하의 임금을 받는 전체 노동자의 약 3/5가 여가 및 접대 산업, 그리고 거의 전적으로 식당 및 기타 식품 서비스에 고용되었다. 이러한 노동자 중 다수는 팁으로 시간당 임금을 보충할 수 있다.9. 전형적인 최저임금 노동자는 결혼 경험이 없는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남부 백인 10대 소녀들이다.최저임금 근로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젊다. 시간당 급여를 받는 취업 청소년(16~19세) 가운데 최저임금 이하를 받는 비율은 약 6퍼센트(25세 이상 근로자 중 최저임금 이하를 받는 비율은 약 1%에 불과)이다. 그들은 통계적으로 여성일 가능성이 크고, 결혼하지 않았으며,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사우스캐롤라이나, 미시시피, 루이지애나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10. 최저 임금 규정은 역사적으로 이민에 대한 의욕을 꺾고 가난한 사람들과 소수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최저임금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우생학을 실천하는 것으로 보였다: 예비 이민자들을 억제하는 것과 고용에서 ‘고용 부적격자’를 걸러내는 것이다. 토마스 레너드(Thomas C. Leonard)는 1900년대 초 진보경제학자들이 “최저임금이 유발한 일자리 감소는 ‘고용 부적격자’의 노동력을 없애는 우생학적 서비스를 수행했기 때문에 사회적 이익”이라고 믿었다고 설명한다. 최근에는 기업가이자 정치 활동가인 론 운즈(Ron Unz)는 최저 임금의 인상은 합법적이건 불법적이건 이민을 줄이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운즈는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비판론자들은 일자리가 파괴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어떤 면에서 그것은 아마 사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위협적인 일자리 중 많은 수가 멕시코나 인도의 저임금 산업과 경쟁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되는 미국과 같이 부유한 발전된 사회에서 자리를 잡지 말아야 할 일자리들이다”라고 말한다.덧붙임: 마태복음 20장은 어떻게 말하는가?예수님의 노동자 비유가 최저임금법에 관한 것인가? 월빌더스(Wallbuilders)[미국적 가치를 되찾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 역주]의 데이빗 바튼(David Barton)과 같은 일부 사람들은 마태복음 20:1-16의 비유가 정부의 최저 임금 법에 대한 예수님의 반대를 보여준다고 믿는다.그러한 이해는 성경을 완전히 잘못 해석한 것이다. 비유의 해석자로서 우리의 임무는 이야기의 관련 의미가 우리의 맥락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의 비유에서 돈과 경제를 자주 언급하셨지만, 어떤 비유의 요점도 결코 우리에게 통화정책이나 경제정책에 대한 방향을 지시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비유에 사용되는 예화는 규범적인 것이 아니라 교훈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불의나 악에 근거한 칭찬할 만한 예화를 사용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심지어 같은 종류의 노동에도 불구하고 다른 임금을 지불하기 위해 사람들과 협상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 없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예시를 개인 윤리의 규범적 기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정부 정책에 대한 직접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또한 15절의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라는 구절은 더 넓은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성경이 분명히 밝혔듯이, 우리는 돈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마가복음 12:17 참조) 그러니 땅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좀 더 넓은 맥락에서의 해석은 무엇일까? 아마도 예수님의 관점에서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경제적인 맥락이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이 비유에서의 한 데나리온은 정부가 하루 노동에 관해 규정한 최저임금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성경에는 정부의 최저임금 제정을 직접적으로 지지하거나 금지하는 내용은 없다. 실제로 저스틴 테일러(Justin Taylor)는 “예수님이 여기서 우리에게 경제 수업을 하고 계신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오래 일하더라도 같은 임금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예수는 사회주의자였다는 주장을 할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고 묻는다.원제: Economics for Church Leaders: How Minimum-Wage Laws Affect the Poo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경제
최저임금
빈곤
임금
달란트
소유
효과적인 재택근무를 위한 아홉 가지 방법
by Devin Maddox
2022-04-03
나는 삶의 대부분에 설계 접근방식(design approach)을 시도한다. 이 접근방식은 먼저 특정한 상황을 평가하고, 그 다음에 문제가 무엇인지 신중하게 식별하고, 그 다음에 수행해야 할 작업에 필요한 도구를 설계한다. 이런 접근방식은 일상적인 습관이나 도서 출판 전략을 개발하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이 접근방식은 또 다섯 식구가 사는 집에서 어떻게 재택근무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활용할 수 있다. 다음은 앞으로 다가올 시대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할 아홉 가지 개요이다. 1. 직장과 집을 구분하는 경계가 흐려지고 있음을 인식하라.우리들 대부분은 앞으로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갈등을 통해 이러한 변화의 역동성을 깨달을 것이다. 새로운 현실은 알게 모르게 다가오고 있다.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오히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어서, 또는 재택근무로 인해 떨어지는 생산성 때문에 좌절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직장과 집이 시간(아침부터 저녁까지)과 공간(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통근)으로 구분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건강한 재택근무 역학을 위한 첫 번째 단계는 처음부터 경계가 모호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2. 근무를 시작하는 시간과 끝내는 시간을 잘 계획하라.앞에서 다룬 첫 번째 원칙과 연결된 내용이다. 근무일에 시작 및 종료 시간을 정확하게 지키면 그나마 경계를 좀 더 명확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직장에서 일할 때보다도 더 엄격하게 지정된 근무 시간 외에는 전화나 문자 또는 이메일에 응답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은 방법은 물리적으로 재택근무를 하더라도 일하는 위치를 지정하고, 근무 시간 외에는 그 장소에 아예 가지 않는 것이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명확한 경계를 정하고 엄격하게 지킬수록 더 효과적일 것이다. 3. 하루를 버티기 위해 습관에 얼마나 의존하는지 (그리고 새로운 습관이 얼마나 필요한지) 파악하라. 습관은 두뇌가 굳이 반복해서 의사결정을 하지 않도록 돕는다. 출근 전 루틴을 놓고 매일 아침 의사결정이라는 과정을 거친다면 얼마나 비효율적일까?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할까? 아니면 일어나자마자 바로 커피부터 마실까? 또는 양치질을 하고 바로 옷을 입을까? 아니면 옷을 입고 양치질을 할까? 믿거나 말거나, 성공한 사람일수록 기본적 결정을 내리는 데 가장 적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그들은 습관을 활용해서 비축한 에너지를 더 높은 수준의 의사결정을 내리는 데에 활용한다. 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과거의 모든 습관이 무너져갈 때, 성공하는 사람들은 빠르게 새로운 습관 또는 일과를 만들어 낸다. 새로운 루틴을 디자인하여 한 주를 시작하라. 이번 주에 새로운 좋은 습관을 만들어 보라. 4. 스트리밍을 넘어 즐거움의 방식을 다양화하라.장기간 사회적으로 고립된 시간을 보내게 되면 두뇌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린다. 즉,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동안 자연스럽게 얻던 만남의 자극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 공백을 채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온라인 스트리밍과 스크롤이다. 아마도 내가 책과 관련된 직업을 가져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회적 공백으로 생긴 시간을 활용해 오랫동안 고민하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는 것은 어떨까? 책, 팟캐스트, 오디오북, 스케치, 또는 그림 등 다양한 입력 방식에 노출될 때, 두뇌는 ‘아, 이번 주는 도대체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라는 비생산적인 생각으로 괴로워하는 대신 생산적인 방향으로 가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5. 한 주를 마칠 때 평가와 함께 다음 주를 계획하라.처음에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다음 주 습관을 재설계하기 위해 주말에 시간을 확보하라.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점점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6. 사회적 연결뿐 아니라 고독을 위해서도 적절한 방법을 찾으라.이것은 엔터테인먼트와 관련이 있다. 두뇌는 다른 두뇌와의 연결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홀로 떨어져 있는 휴식도 필요하다. 룸메이트나 가족과 함께 산다면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 모두 다 양은 다를지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사회적 연결의 부족을 예상하는 재택근무는 오히려 예기치 않게 “혼자만의 시간”(alone time)의 부족함을 노출할 수 있다. 우리는 친구들과 페이스타임(FaceTime)을 할 계획을 세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도 생활공간 어딘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찾아야한다. 7. 운동과 활동을 위한 적절한 방법을 찾으라.정상적으로 출근할 때 나는 평균 하루에 몇 마일을 걷는다. 집을 나와 차로 걸어가고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따라 걸어서 사무실로 향한다. 아침이면 회의 장소를 찾기 위해 캠퍼스를 돌아다닌다. 나는 뒤로 걷기도 한다. 그리고 저녁에는 아침에 걷던 과정을 역순으로 반복한다. 내 몸과 마음은 전반적인 웰빙 감각을 위해 이런 평소의 움직임에 의존한다. 걱정하지 말라고 뇌를 안심시키기 위해 움직일 시간과 장소를 찾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문제이다. 8. 하루에 뉴스는 두 번만 확인하고 불안감을 줄이라.솔직하게 말해 보자. 지난 두 주 동안 온라인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나 늘어났는가? ‘디지털 미니멀리즘’(Digital Minimalism)의 저자 칼 뉴포트(Cal Newport)는 우리의 불안을 제한하기 위한 훌륭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아니, 그렇다고 그의 제안이 아예 뉴스를 보지 말라는 게 아니다. 그가 제안하는 건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특정 시간을 계획하여 외부 세계를 확인하라는 것이다. 더 긴급한 소식이 있다면 그건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알려줄 것이다. 9. 이 모든 것이 나의 영적 훈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나는 가능한 한 영적 훈련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를 너무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디를 여행하더라도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시간을 내어 기도, 성경 읽기, 묵상, 금식 등을 수행할 수 있다. 나는 처음에만 해도 나 자신이 영적 실패자라는 생각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경건의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하면 영적으로 실패했다는 영적 멘토들의 말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적 성장을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 영적 안정감이야말로 하루 생활의 모든 면에서 성공하기 위한 가장 핵심이 되는 기초이기에, 영적 성장을 고려하여 하루를 설계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팬데믹 시대의 생산성다음은 내 아내가 알려준 밈이다. 1665년 런던에서 전염병이 돌자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문을 닫았고 아이작 뉴턴은 집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기간 동안 그는 광학 이론의 일부인 미적분학을 발명했으며, 정원에 앉아 있는 동안 중력과 운동 법칙의 이해에 결정적 영감을 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목격했다. 이러한 주장이 과연 사실인지 여부는 모르겠다. 그러나 (속도를 늦추고 더 집중하게 하는) 지금의 이 이상한 기간이 오히려 더 큰 생산성과 혁신 나아가서 더 놀라운 영적 부흥까지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원제: 9 Ways to Work Efficiently from Hom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영적훈련
팬데믹시대
재택근무
생산성
습관의중요성
코로나와영적성장
디지털중독
아이작뉴턴
모두에게 필요한 기독교적 기업가정신
by 김선일
2022-04-02
코로나가 한창일 때 서점에서 직원들끼리 하는 말이 내 귀에 들어왔다. “주식 책 진짜 잘 나간다!” 필자에게는 주식 책은 남들의 관심사였지만, 전대미문의 코로나 광풍 반대편에서는 전국적으로 주식과 부동산을 비롯한 투자 열풍이 맞바람처럼 일어났다. ‘머니러시’ ‘욜로의 종말과 투자 열풍’ ‘평생직장보다 평생수입’ ‘1억 모으기’ ‘디지털 자산과 NFT’…. 2022 트렌드 서적들에서 공통으로 눈에 띄는 구절들이다. 과거 “부자 되세요~”가 유행어였던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목적과 이유가 좀 더 구체적이다. 슈퍼개인으로 살려면, 취향의 연대만으로, 친환경적 삶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도 경제적 자유는 필수 조건이다. 재테크 열풍은 언제나 뜨거웠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수입원과 투자 영역에 눈을 뜬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주가가 유례없는 대폭락을 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오히려 코로나 이전을 뛰어넘는 V자 반등을 보였다. 저금리와 재난지원금으로 엄청난 돈이 풀리면서 주식뿐 아니라 부동산 가격도 더욱 치솟았다. 소상공인들과 저소득층에게는 인고의 시간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산을 증식할 절호의 기회였다. 주식, 부동산, 비트코인, 환테크, NFT 투자 등 새로운 재테크 상품들이 속속 선보인다. 미래 지향적인 메타버스나 기업의 건전성을 상징하는 ESG 같은 개념들이 유행을 탄 것도 사실은 각광받는 투자처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투자는 위험을 안고 있다. “영끌”해서 부동산을 마련한 이들은 하락의 가능성으로 불안해 하고, 주식은 원금도 날릴 수 있는 고위험 투자다. 비트코인, NFT 같은 디지털 자산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것 같지만, 높은 기대는 항상 거품을 동반한다. 이러한 고위험 투자에 젊은이들이 더욱 적극적이다. 위험한 줄 몰라서가 아니다. 신중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현재의 월급만으로 경제적으로 자유롭고, 높아진 삶의 질적 기대에 부응하며 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들은 기성세대에 비해서 디지털 경제의 개념과 용어에 익숙하고, 유튜브의 재테크 방송과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신속히 정보를 습득하는 학습력을 갖췄다. 5, 6년 전부터 유행했던 “인생은 한번 뿐이다”(You Only Live Once)라며 현재의 삶을 즐기자는 ‘욜로’(YOLO)가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아 현실의 절박함을 처절하게 체험한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줄어들었다. “지금 당장의 만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은 2017년 53.8퍼센트에서 2021년 41.4퍼센트로,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후회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75.8퍼센트에서 55.6퍼센트로 대폭 줄었다(2022 트렌드 모니터, 40-41). 그렇다고 삶의 기대 수준이 저하된 것은 아니다. 소소한 지출은 줄이되, 한 번쯤 나를 위로하는 품격 있는 소비에는 인색하지 않다. 점심값을 아끼려고 도시락을 이용해도 6만원이 넘는 호텔의 망고빙수는 줄을 서서라도 먹을 가치가 있다. 이와 같은 ‘파인 다이닝’이나 자기과시적인 ‘플렉스’(flex) 문화는 저성장과 취업난 속에서 현실적으로 참고 살아가는 스트레스를 한 번씩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2022 트렌드 노트, 90-93). 평생고용의 신화가 무너지고 AI와 로봇에 의한 일자리 대체가 점점 현실이 되어가자 불안한 월급만으로는 미래의 생존과 삶의 질을 유지하기에 턱없이 보였다. 게다가 아무리 안정적 직장이라 하더라도 남에게 고용되어 맞추며 살기보다 자기만의 주체적인 인생을 개척하고 즐기고자 경제적 자유를 획득하고 조기 은퇴를 이루는 파이어 족이 선망의 대상이 됐다. 이처럼 수입과 투자에 대한 뜨거운 관심이 대중화, 다각화되는 현상은 과거 미국의 서부개척 시기에 금을 찾아 몰려들었던 골드러시(Gold Rush)에 빗대어 머니러시(Money Rush)라 불린다(트렌드 코리아 2022, 195). 머니러시의 시대에 사람들은 각자의 여건과 관심에 따라 수입의 다변화를 꾀한다. 첫째, 앞서 말한 것처럼 디지털 자산과 같은 투자 유형의 확대다. 이는 소득을 창출하는 파이프라인이 많아졌음을 의미할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디지털화되어 가는 중요한 라이프 트렌드의 전환이다(라이프 트렌드 2022, 201). 디지털 콘텐츠가 자산의 가치를 갖는 것은 아직은 낯설지만 이미 시작된 미래의 모습이다. 둘째로, 소위 ‘N잡러’라는 여러 직업을 병행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여기에는 하나의 일자리로는 수입이 충분하지 않기도 하지만, 돈벌이뿐 아니라 자신의 관심과 능력을 개발하고 싶은 욕구도 있기 때문에, 생계와 자아실현이라는 이중적 이유가 있다. 셋째로는 이러한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 개인의 앙터프리너십(entrepreneurship) 개발 필요성이 부상한다. 김난도와 공저자들은 기업경영에서 주로 사용된 이 기업가정신이라는 개념이 개인에게도 적용되는 시대가 왔다고 말한다. “자신의 관심과 역량에 맞는 자기만의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해 나갈 필요가 있다”(트렌드 코리아 2022, 218-219). 이미 여러 유튜브와 대중강연자들도 자신을 브랜드화하고, 자기만의 관심과 취향으로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지속적인 시스템 수입의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투자의 대중화, N잡러, 앙티프리너십의 부상은 변화하는 시대에 경제적 주체성과 자유를 찾기 위한 유력한 방식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은 이러한 경제적 관심과 해법을 찾는 트렌드에 어떠한 성찰과 영향력을 제공할 수 있을까? 종교개혁 전통은 인간의 경제적 활동과 관련해서 풍성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일에 소명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은 루터와 칼뱅과 같은 개혁자들의 가르침이었다. 먼저, 다양한 투자 열풍은 현대 금융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깊이 지배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금융자본주의는 제품생산과 서비스와는 무관하게 이익이 이익을 창출하는, 한마디로 돈이 돈을 버는 시스템이다. 세계 경제가 상호의존하면서 온갖 복합한 금융거래 상품들이 등장한다. 레버리지(차입금)를 통한 투자는 금융자본주의에서 부를 늘리는 최고의 능력으로 꼽힌다. 개신교 정신이 자본주의의 발흥에 정신적 촉매 역할을 했다는 막스 베버의 이론적 틀을 빌려, 캐스린 태너(Kathryn Tanner)는 그의 ‘기독교와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에서 기독교 신앙은 오늘날 금융자본주의에 저항하며 대안적 가치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과거에 돈을 빌렸거나 신용을 통해 투자한 이들은 현재의 모든 삶이 과거에 속박되어 미래를 상실하며 영구적인 긴박성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진단한다(Christianity and the New Spirit of Capitalism, 105). 기독교적 회심은 우리를 과거에 얽매인 삶에서 새로운 현재와 미래로 이동시키며, 은혜와 선물의 경제는 경쟁적으로 자기 충동적 이익을 추구하는 삶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현실의 상황에서 태너의 진단은 예리하고 해법은 다소 추상적이긴 하지만, 금융투자 열풍에 휩쓸리기 쉬운 그리스도인에게 의미 있는 경종이 될 것이다. 둘째로, N잡러나 긱 이코노미(gig은 단기적, 일시적 일을 뜻한다)가 현실이 되어 가는 상황에서 기독교 신앙은 전통적인 소명론을 넘어서는 일의 의미를 재조명해 줄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가 하는 그 어떤 일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닌 한 하나님 앞에서 성스러운 소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고정적인 평생 일자리가 급속히 줄어들고 사람들이 다양한 일자리를 통해서 생계를 해결하고 자신의 커리어를 개발해야 하는 시대에 기독교 신앙은 성령의 은사로서 일이라는 개념에 주목해야 한다. ‘일과 성령’에서 미로슬라브 볼프는 일의 불확실성과 유동성이 심화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다양한 시기와 장소의 일을 통해서 자신의 새로운 은사를 발견하고 표현하며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 참여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은사는 한 사람에게 한 가지만 존재하기보다는 그가 처한 사회적 역할에서 다양하게 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에서 소명을 배제하고 개인의 은사를 통한 커리어 개발에만 집중하자는 것은 아니다. 일이 오로지 자아실현과 수입의 용도로만 인식되는 풍조에 기독교적 소명론은 여전히 선한 영향력을 제공한다. 맥킨지 보고서는 팬데믹 이후, 원격 근무의 지속적 확장과 AI 체제의 가속화로 인해 인간의 일에서 사회적, 정서적 역량이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본다. 기독교적 소명론은 수동적이고 자기보호적인 태도를 넘어서 일터에서의 상호 협력과 섬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의 가치를 회복하는 데 여전히 기여할 수 있다. 끝으로, 앙티프리너(entreprenuer)가 갖춰야 할 기업가정신(enrepreneurship)은 세계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며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인간이 동참하기 위해 필요한 청지기적 사명이기도 하다. 기업가정신은 영리 비즈니스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세계에서 하나님 나라의 선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창의성, 혁신, 모험을 수반하는 정신이다. ‘일터신학’의 저자 폴 스티븐스(Paul Stevens)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공동체(남자와 여자로, 또한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은 서로에게 필연적으로 의지하고 교류하며 기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위한 사제의 역할을 맡은 앙티프리너라고 그는 주장한다(Doing God’s Business, 176). 변화하는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기업가정신이다. 이는 기회를 포착하고, 혁신을 기획하며, 실행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이 기업가정신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인간에 대한 돌봄과 섬김의 마음으로부터 동기부여 되어야 한다. 적정한 수익을 추구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됨을 상실하지 않는 적정한 수익 추구여야 한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 수익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 삶을 보존하고 향상시키기 위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즈니스를 위해서 수익은 필요하다. 4차 산업혁명과 포스트코로나는 우리 사회에 거대한 변화의 물꼬를 트고 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일과 비즈니스라는 경제적 활동에서 일어날 것이다. 변화의 시대에는 항상 기회를 틈타 인간의 탐욕과 왜곡된 진리가 창궐하여 사람들의 불안하고 불확실한 마음을 사로잡으려 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러한 시대를 교정하고 선도하기에 충분한 차원을 갖고 있다. 새롭게 확장될 일터와 비즈니스의 세계는 21세기에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고 증언하는 가장 치열한 선교의 현장이다. 이전 글: •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 세계관과 내러티브 열풍 • 메타버스와 교회의 과제 • 복음중심 신앙은 생태적 감수성을 동반한다• 일상의 재발견: 루틴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 • 슈퍼개인의 시대: 기독교적 개인주의를 위한 변명• 트렌드를 읽다, 복음에서 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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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관리를 위한 여섯 가지 교훈
by Sarah Eekhoff Zylstra
2022-01-21
나는 생산성을 좋아한다. 그렇다 보니 칼 뉴포트(Cal Newport)와 로라 벤더캄(Laura Vanderkam) 같은 작가들의 글을 즐겨 읽고, 시간 관리에 도움을 주는 다양한 팟캐스트를 듣는다. 나는 생산성과 관련한 정보와 요령을 수집하고 필요한 습관과 목표를 모으기도 한다. 나는 정말로 시간을 잘 관리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한 목적이 이끄는 효과적인 삶을 살기 원한다.그러나 시간 관리와 관련한 모든 조언이 결국에 가서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내가 항상 생산적일 수는 없다는 진실 때문이다. 나에게는 느린 날, 중단된 날, 그리고 게으른 날이 있기 마련이다. 오후에는 특히 더 피곤하다. 소셜 미디어 때문에 산만해지기도 한다. 매순간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과 불안을 느낀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올바른” 일을 하고 매분매초를 효율적으로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피곤과 더불어 게을렀다는 느낌으로 하루를 끝낼 수도 있다.당신은 나처럼 느낀 적이 없는가? 하루 일정을 도무지 쫓아가지 못할 것 같은 때는 없는가? 게으름과 열정적인 활동 사이를 수시로 오가는 것처럼 느낀 적은 없는가?아마 당신도 나처럼 시간과 좀 더 나은 관계를 찾는 길을 모색하고 있을 것이다. 바른 양의 시간하나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완벽하게 만드셨는지를 막 이해하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홈스쿨링을 하는 엄마였다.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는 우리에게 딱 적절한 양의 따뜻함과 빛을 주기에 적절하게 맞춰져 있다. 지구에는 호흡뿐 아니라 우주의 추위와 태양 복사로부터 우리를 완벽하게 보호하는 정확한 대기가 형성되어 있다. 게다가 정확한 양의 중력, 작물을 재배하기 위한 정확한 토양, 물 순환에 적합한 정확한 양의 물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꼭 맞는 식물과 동물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적절한 몸도 가지고 있다.모든 것은 일종의 제약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주 공간에서 숨을 쉴 수 없다. 화성에서 작물을 재배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금성에 있다면 당장 타 죽을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지구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지구가 감옥은 아니다. 지구는 우리를 위해 완벽하게 설계되었다.시간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나님은 계절 속에 몇 주를, 그리고 한 주 속에 각각의 날을 분명하게 구분하셨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완벽한 한계이다. 연구에 따르면 매일 밤 예닐곱 시간의 수면이 우리 몸에 가장 좋다고 한다. 최적의 근무 시간은 하루 약 여덟 시간이다. 그래서인지 일주일에 서른여덟 시간 이상 일하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쉰 시간 넘게 일하면 생산성이 급감한다. 주7일제(창세기에 나와 있는 시간의 표준)는 너무도 뿌리 깊게 박힌 시스템이다. 그래서 그런지 과거 소련이 주5일제를 시행하고, 프랑스가 주8일제를 시행했을 때, 그 결과는 둘 다 끔찍한 재앙이었다.깨끗한 공기와 채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하루와 한주와 한해라는 시간을 좋은 선물로 창조하신 것이라면, 그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도록 할까? 너무 느슨하거나 너무 빠듯한 경우나는 아이오와에서 자랐다. 그곳에선 달력을 보는 것보다 옥수수 밭을 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농부가 밭을 관리하는 행동 방식은 우리가 시간을 관리하는 행동 방식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극단으로 떨어질 수 있다. 너무 느슨하게 풀어 놓거나 아니면 너무 꽉 조이는 경우이다. 너무 느슨하게 풀어 놓는 밭은 엉망이 되기 마련이며, 바위와 잡초가 사방에서 솟아나서 농작물을 죽인다. 너무 느슨하게 보내는 하루 또는 계절은 형편없는 계획으로 낭비되기 십상이다. 비디오 게임이나 소셜 미디어에 빠져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반면에 너무 빡빡하고 빠듯하게 관리되는 밭은 과도하게 경작되기 쉽다. 너무 많은 화학 물질이 비료로 뿌려지고, 그 결과 땅의 영양분이 고갈되고 토양은 그 생명력이 마모될 때까지 계속해서 경작된다. 하루도 너무 빡빡하게 관리될 수 있다. 너무 많은 일정과 여유시간조차 쥐어짜서 경제적 생산성을 올리려는 욕심에 휴식은 말할 것도 없고, 예기치 않은 순간에 주어지는 성령의 음성이 개입할 여지조차 남기지 않을 수 있다.이런 양극단의 삶 대신에 우리는 정원과 시간 모두를 다 잘 기르고 번성시켜 건강한 생산성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럼 시간 관리자가 농부와 정원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땅에서부터 오는 교훈1. 계획(작물 절반을 새나 바위투성이 토양에 빼앗기고 싶지 않은 한) 한 움큼의 씨앗을 아무 생각 없이 밭 아무데나 던져서 심는 사람은 없다. 대신 농부들은 다양한 식물을 다양한 유형의 토양에 맞게 조심스럽게 심고 세밀하게 추적한다. 시간 계획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미 몇 부분에서 농부의 경작 방식과 일치한다.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하고, 보통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하고, 심신이 지쳤을 때는 금요일 저녁에 영화를 볼 수도 있다. 조금 더 관찰해 보자. 고도의 집중이 필요한 작업은 가장 에너지가 충만한 시간 (대부분의 경우 오전 10시에) 할 수 있다. 에너지가 떨어지는 시간은 일반적인 관리 작업을 하는 데 쓸 수 있다(목요일 오후 정도). 시간 관리 전문가 로라 밴더캄(Laura Vanderkam)은 보통 업무 활동을 마무리하는 금요일 오후에 주간 계획을 작성하라고 권장한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회의에 참석하기를 원한다면, 화요일 오후 2시 30분에 회의를 열라고 조언한다. 2. 밭 갈기밭을 갈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또는 오랫동안 쉬지 않고 뭔가를 시도했다면) 올바른 시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이다. 처음 시작이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시간이 갈수록 궤적은 점점 더 잘못된 방향으로 나간다. 하루의 시작도 다르지 않다. 나는 율법주의자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아침에 경건 시간을 가지라는 명령은 성경에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주님과 가장 먼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시간이 하루의 질을 결정한다고들 증언한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멀리 있는 목표물에 시선을 고정함으로 농부는 직선으로 똑바로 계속 이동할 수 있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또한 오로지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여, 예배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가다듬을 수 있다. 기도나 찬양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하루 중 잠시 멈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초점을 다시 주님께로 조정하고 영혼을 새롭게 하는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것이다. 3. 잡초 제거에덴동산 이후로 우리는 끊임없이 잡초와 싸워 왔다. 정원사와 농부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잡초를 제거한다. 손으로 뽑기, 퇴비 뿌리기, 괭이질, 화학약품 살포 등등. 단, 당신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잡초가 스스로 사라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잡초를 아예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잡초는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도 세심한 가지치기는 유익을 준다. 달력을 꽉 채우는 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약속은 나름의 공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우리가 끊임없이 나라는 존재의 존재 목적을 기억하고 어떤 약속과 활동이 그 목적에 부합하는지를 계속 상기하지 않는다면, 소중한 주말과 저녁 시간은 잡초로 뒤덮이고 말 것이다. 민들레의 노란 솜털과 엉겅퀴의 보랏빛 꽃처럼 시간을 질식시키는 잡초가 언뜻 보기에는 전혀 해롭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를 자라게 못하게 한다. 그러니 우리의 소중한 시간에서 제거해야만 한다. 지금 이 비유를 아침과 오후 시간에도 적용할 수도 있다. 휴식이 필요한데도 끝없이 이메일을 확인하거나 비생산적인 기다림으로 시간을 낭비하기 쉽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일정에서 잡초를 찾아내고 불필요한 가지를 쳐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4. 비료 주기작물은 땅에서 영양분을 흡수하여 자란다. 토양은 사람이 먹기 위해 가져간 작물 외에 죽고 썩은 작물로 인해 다시 영양분을 흡수한다. 그렇기에 농부들은 퇴비, 거름, 화학 물질과 같은 비료를 사용하여 토양에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한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좋은 습관을 사용하여 에너지를 일상 속으로 되돌릴 수 있다. 작업은 자연스럽게 에너지를 고갈시키며, 에너지 보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활동이 작업 사이에 들어 있기 마련이다. 심야에 넷플릭스 몰아 보기, 장시간 인스타그램 스크롤, 아침 식사로 사탕 먹기. 그러나 제시간에 잠자리에 들기, 일정한 아침 일과 하기, 차 안에서 찬양 부르기, 책 읽기, 점심시간에 감사 일기 쓰기, 점심시간에 20분 걷기, 잘 차린 저녁 식탁에서 가족과 대화 나누기 등등은 우리의 삶을 채우는 습관이다. 하루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수십 가지의 건강한 방법이 있다.5. 비밭을 갈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농부에게 악천후보다 더 실망스러운 것도 없다. 비는 하루의 계획을 무산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성장에 꼭 필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우리의 질문에 제때 응답하지 않은 동료나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린 가정 또는 예기치 못한 사고가 생겨서 일일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 그럴 때면 당황하거나 좌절하기 쉽다. 하나님께서 그런 좌절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어떻게 사용하시려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때면 특히 더 그렇다(롬 8:28). 그러나 그럴 때 정원사의 모범을 따르면 어떨까? 예상치 못한 비가 주는 실망을 이겨 내고 다른 일에 몰두하면 어떨까? 6. 추수레위기에는 가장 초기에 기록된 농업 관련 조언이 담겨 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9-10).업무, 회의, 약속을 잡을 때, 중간 중간 다음 작업으로 이동하는 데에 딱 필요한 시간만큼만 남겨 두는 게 바로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는 것이다. 당신이 그런 식으로 일을 해봤다면, 여유를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 때문에 당신은 분명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고, 또 그런 사람에게 얼마나 조바심을 내곤 했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공간만 만들면 동료나 아이들과 예상치 못한 대화의 시간이 생길 수도 있다. 생산성 전문가들은 이것을 여백(margin)이라고 부른다. 시간을 내어 친구에게 안부를 묻거나, 아이의 작품에 감탄하거나, 교대 근무를 마치고 누군가를 집에 데려다 줄 수도 있다. 시간 추수(time gleaning)는 하루의 속도를 완화하며 남는 시간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돕는다. 하나님이 컨트롤하신다나는 땅을 사용한 이 비유를 계속 쓸 수 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씨를 뿌릴지 주의해야 하며, 그 식물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휴지기를 가진 토양이 더 많은 작물을 생산한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게으름 때문이 아닌 더 나은 생산성을 위한 휴식 시간을 정해야 한다. 열매 맺는 시간 활용을 통해 수확의 계절을 맞을 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성취를 축하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그러나 이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우리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이오와에서 자란 나는 건방진 농부를 만난 적이 없다. 아무리 신중하게 계획을 세우고, 똑바로 쟁기질을 하고, 쉬지 않고 잡초를 뽑고 비료를 준다 해도, 농부의 그 어떤 노력도 결코 좋은 수확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농부라면 누구나 다 너무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비와 햇빛을 가져다주신다. 하나님은 옥수수와 콩과 밀이 싹이 돋고 무럭무럭 자라게 하신다. 일하는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가 보장되지 않는 것이 농사처럼 명백한 직업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계획하고 시간을 쪼개고 또 유명한 일정 관리 도구를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수고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간을 허락하신 동안 오로지 하나님만이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최대한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한다. 이 새해, 우리의 시간이 풍족하고 번성하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딱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게 하소서. 오직 주께 영광을!원제: 6 Lessons for Tending Your Tim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시간관리
청지기
농부의지혜
잡초제거
생산성향상
친애하는 기업가에게
by J. D. Greear
2021-10-28
우리가 가진 모든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노력을 단지 한 곳에만 독점적으로 쏟는 데에는 비용이 든다. 나는 전도서보다 이런 갈등을 다루기에 더 적합한 성경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전도서의 대부분은 헤아릴 수 없는 부,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혜와 더불어 비할 데 없는 권능까지 가졌던 솔로몬이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인생이 종종 헤벨(hevel)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한다. 헤벨은 “증기” 또는 “연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이다.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 실망을 주는 네 가지 영역솔로몬은 성공 때문에 도리어 실망하게 되는 삶의 네 가지 영역을 구분한다. 오늘날 모든 기업가는 이 네 영역을 면밀히 주시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추구하는 선의의 기업가 정신이 허무한 헤벨로 전락하지 않으며, 인상적으로 보이지만 구름에 불과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있다. 1. 쾌락은 궁극적으로 실망을 준다솔로몬은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전 2:10)라고 말한다. 솔로몬의 모든 소유는 금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전 세계에서 가장 풍성하고 이국적인 음식을 즐겼다.그러나 솔로몬은 단순히 돈만 많은 부자가 아니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는 너무 박식했기에 다른 나라의 왕과 왕비들이 그의 지식에 감탄했다. 그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주제에 관해서 베스트셀러를 쓸 수 있었다. 그는 수천 년 동안 지속된 노래를 만들기까지 했다.이런 모든 것을 소유한 솔로몬의 결론(verdict)이 무엇인가?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다른 말로 하면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 할 수 있는 거 다 해봤어. 그리고 성공했지. 그런데 그게 다 완전히, 완벽할 정도로 헛된 것이더라고.”2. 때로는 가장 뛰어난 비즈니스 지혜도 실패할 때가 있다다시 솔로몬이 말한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전 9:11).기업가라면 대체로 현명한 비즈니스 관행이 어리석은 관행을 이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일반 원칙이 결코 철칙은 아니다. 때로는 운이 따르지 않을 때도 있다. 현명한 비즈니스 관행이 자동으로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당신의 인생 전체가 무너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이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기회도 될 수 있다. 3. 마찬가지로, 세상의 정의 시스템은 결국 실패한다솔로몬은 다시 말한다.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8:14).누구나 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이런 고통스러운 현실과 씨름한 적이 있다. 때때로 이 땅에서 선은 결코 보상을 받지 못하고, 악은 전혀 처벌받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악이 처벌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공의 길로 가는 비결처럼 보일 때도 있다.그럼 이런 식의 비즈니스 불공정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당연하다. 우리가 쓸 수 있는 권한 안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스스로 청렴의 본보기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청렴까지도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솔로몬이 알고 있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종종 부패는 승리한다. 그런데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청렴과 의라는 기업가 정신에 기반하고 있다면, 부패가 승리하는 현실은 얼마든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위협할 수 있다. 4. 노동의 열매는 무너진다“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18–19).우리는 승계 계획(succession plans)을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내가 은퇴하고도 지속될 수 있도록, 회사에 사명선언문을 작성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후계자를 세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좋든 싫든 때가 오면 우리는 기업에서 손을 떼야 한다. 기업가를 위한 네 가지 진리자, 이처럼 우리가 하는 일이 지속되지 않고, 정의가 우리를 실망시킬 수도 있다면, 왜 굳이 옳은 일을 하는 데 신경을 써야할까? 그냥 대충 생활하고 다른 사람이 더러운 건 청소하도록 놔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솔로몬은 우리가 더 큰 그림을 보도록 자극한다. 기업가 정신이 결코 우리에게 만족, 의미 또는 중요성을 가져다주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다음은 기업가 정신의 헤벨(entrepreneurial hevel)이 초래할 수도 있는 위험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는 솔로몬의 네 가지 진리이다. 1. 당신은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음을 깨달으라!만족과 의미 그리고 가치는 결코 세상 성공에서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정체성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바로 그 정체성에 뿌리를 내릴 때, 삶의 우여곡절은 고작해야 딱 어느 정도까지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뿐이다. 물론 성공은 여전히 기분 좋은 일이다. 동시에 실패는 여전히 끔찍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한 닻을 내리면, 결코 성공이 우리를 취하게 할 수 없고, 실패가 우리를 황폐화시킬 수 없다.전도서는 세상 모든 것의 무의미함에 비추어 볼 때,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솔로몬이 깨닫는 것으로 끝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그리고 오로지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 2. 확실한 심판을 생각하며 네 삶을 정리하라죽음과 하나님의 심판은 당신의 삶에서 유일하게 절대적인 두 가지 현실이다. 당장 오늘 오후에 그 심판이 올 수도 있다. 그게 칠십 년 후일 수도 있다. 언제가 되었든, 반드시 올 것이다.이런 현실이 우리를 두렵게 해서는 안 된다. 믿는 자들을 위해 죽음 저편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차리게 하고 삶에 대한 기대를 조절하도록 만든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오로지 어리석은 자만이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산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말한대로, 네 남은 날을 세는 법을 알고 그 날을 세면서 살아야 한다. 3.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찾고 그 일을 추구하라솔로몬은 인생에서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고백한다. 탁월한 기술, 신중한 계획, 의로운 생활도 성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지혜와 계획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한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 11:6). 다시 말해서, 삶의 불확실성과 실패 가능성이 나를 마비시키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다. 기업가인 우리가 성공에 대한 철통같은 신성한 약속을 원한다고 해서, 그런 게 인생에서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현명하고 잘 계산된 위험마저 감수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4. 미래가 아닌 현재에서 행복을 찾으라우리에게는 항상 “밖에서” 행복을 찾고자 노력하는, 진짜 유혹이 있다고 솔로몬은 설명한다. 그러나 행복은 바로 저기, 눈앞에 있는 게 아니다. 행복은 지금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따라서 나중이 아니라 지금 찾아야 한다. 당신이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당신이 처한 상황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라고 솔로몬은 말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바로 이것이다. 솔로몬의 결론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를 경외하며, 때가 되면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파스칼(Pascal)은 ‘팡세’(Pensées)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겪는 비극을 기술했다. 파스칼에 따르면, 그들의 비극은 항상 나중에 즐기기 위해 살기 때문에 현재 속에서 인생을 즐기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파스칼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현재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한다고 해도, 고작해야 미래에 비춰서 지금 현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할 뿐이다. 그렇다보니 현재는 결코 우리의 목표가 되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는 단지 수단에 불과하며, 미래만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짜로 살지 못한다. 단지 살고 싶다고 희망할 뿐이다. 결국 우리는 항상 어떻게 행복할지 계획만 세우기에,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운명이다. 기독교인에게 이게 사실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미래뿐 아니라, 오늘도 자녀들을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두셨기 때문이다. 원제: Dear Entrepreneu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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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비결
팡세
하나님의심판
승계계획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하기
by David Boxerman
2021-10-04
내가 만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 같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한다. 개인적인 결정을 내릴 때, 특히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중요한 결정일 경우(“하나님이 예비하신 결혼 상대가 이 사람이 맞습니까?” 혹은 “이 일자리가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이 명확한 답을 주시길 우리는 바란다. 그렇게 바라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게 아니다. 특히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잡고 책상에 앉아서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원한다. 편안한 자세로 우리가 직면한 상황을 다 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정확히 말씀해 주시기를 원한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굳이 내가 나서서 결정하는 과정을 거치기 전에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알아서 그 일을 이끌어 가기 원하는 것이다. 문제는 개인적인 결정을 내릴 때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어떻게 그 인도하시는 방향을 바로 알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우리는 성경이 계시한 것 외에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려 하는 가의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도움을 주실 때 어떻게 하시는지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내가 찾아낸 사실은 개인적인 의사 결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주신 원칙을 따르는 바로 그 과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서 꼭 필요한 구체적인 결정을 내릴 때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도움을 주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방법이다. 가장 기본이 되고 꼭 필요한 처음 두 개를 제외하고는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다음에 설명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가야 할 길을 우리에게 알려주신다.1. 성경: 드러난 하나님의 뜻 그리고 “신앙과 삶의 유일한 원칙”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결정의 지침과 조언을 구하는 데 있어서 분명하고 오류가 없는 유일한 원천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시 119:105-6).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어기는 결정이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2. 기도: 믿음에 기반을 둘 때 하나님은 들으신다그분은 사랑 많으신 아버지이시며 의사 결정 과정에서 언제나 도와주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3. 당신을 잘 아는 거룩하고 성숙하며 성경적으로 지식이 많은 기독교인이 주는 조언우리가 내린 결정에 확신을 줄 수 있는 사람, 우리가 고려하지 않은 잠재적인 위험, 도전 또는 기타 요인(사각지대)을 경고할 수 있는 사람과 의논하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된다.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3:10).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잠 20:18). 이러한 일반 원칙을 자주 위반하는 것 중 하나는 덜 성숙한 사람이나 비기독교인 친구에게 상담을 받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악인의 도모는 속임이니라”(잠 12:5)라는 말씀에 근거할 때 상담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성경에 정통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4. 준비, 확인, 창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오류가 전혀 없는 상황 해석이란 게 있을 수는 없겠지만, 약간의 오류를 인정하더라도 그 상황 또는 환경은 주님의 지시를 나타내는 중요한 표시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정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계 3:7). 아직 오지 않은 기회조차도 주님의 주권 아래 있다. 우리가 마주하는 어떤 타이밍이나 기회의 방향을 하나님이 언제라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의사 결정 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할 요소이다. 5. 이미 주신 하나님의 빛 속에서 순종함으로 걷는 것“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요일 1:7). 우리는 빛 가운데서 걸어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선명하게 밝히신 부분조차 인정하지 않고 그분을 무시하는 가운데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한다면 우리의 그런 요청을 하나님이 들어주실 이유가 없다.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야고보서 1:7-8).6. 관심사, 은사, 소망 및 재능하나님은 우리의 소망, 은사, 재능을 통해 그분의 뜻으로 인도하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일과 능숙하게 하는 일을 결합하여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하신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롬 12:6).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시 37:4-5).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잠 10:24).7.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 이 결정이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결정인가? 아니면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짐으로 나만 위한다면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요소까지 고려하여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빌 2:4).8. 내적 평안의 여부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남용되는 기준일 수 있다. “이게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뜻이라고 느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찾기보다는 합리화나 죄의 변명으로 더 자주 사용된다. 감정은 결코 최종 결정자가 아니다. 감정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 어떤 일과 관련해서 평안을 말하려면 다음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요약하면, 하나님의 인도 방법은 섭리 가운데 원칙을 따르게 하시고 더 나은 것을 찾게 하시는 과정을 통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도움을 구하고, 성경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생각하고, 대안을 비교하고, 조언을 저울질하고, 마음의 소망을 고려하고, 스스로 능력을 평가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내디딜 때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하신다.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그분이 더 놀랍게 역사하실 일이 무엇인지, 어떤 방법으로 역사 하실지를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역사를 받기에 부족한 존재임을 깨닫고, 항상 겸손한 자세를 유지한다면 놀라운 지혜는 언제라도 주어질 것이다. 주의와 위로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이 “처방”과 더불어 경고 라벨이 붙어야 한다. 프로세스의 한 측면을 강조하다가 자칫 다른 측면을 간과하게 될 때 어려움은 불가피하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찾는 과정에서 잘못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단일 소스” 솔루션은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의 ‘감정’이다. 특히 이 두 가지 중 하나에 집중하여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할 때 ‘나쁜 결정에는 결과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죄는 언제나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라는 내용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개인적인 결정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여전히 정확하지 않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의 일과 욕심을 살피라고 하면서도 동시에 마음은 거짓된 것이라고 말한다(렘 17:9). 우리는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해야 하지만, 누군가의 조언은 또 다른 사람의 조언과 얼마든지 상충할 수 있다(잠 18:17). 우리는 모든 상황을 고려해야 하지만, 상황 판단만으로는 결코 오류 없는 지침을 내릴 수 없다(창 3:6).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만, 그분의 응답은 직접적인 계시나 환상의 형태로 오지 않는다(히 1:1-2).문제가 생길 때면 언제나 하나님이 준비하신 차선책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최선책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모든 결정, 심지어 잘못 내린 결정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그의 모든 거룩한 뜻과 궁극적인 목적을 항상 성취하신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시편 57:2).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시 138:8).어떤 결정을 내릴 때 평화와 확신을 가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의 궁극적인 선과 그의 최종 영광을 위해 모든 결정 과정에서 인도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길에 개입하시고 인도하실 수 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 그분을 찾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선하고 옳은 일을 하려는 올바른 동기로 내린 결정이라면 대부분 상황을 더 쉽게 만든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결정을 통해서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일을 망치고 엉망이 되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실수까지도 선용하신다. 여전히 우리의 선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신다. 불안과 두려움이 휘몰아치는 바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평화와 위안은 오직 하나, 그분이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롬 8:28)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원제: God’s Will and Personal Decision Making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명
하나님의뜻
인도하심
의사결정
섭리
은사
내적평안
차선책
성경
세상의 소금이 된다는 건 진짜 무슨 의미인가?
by Andrew Wilson
2021-08-2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피조물 중에 소금만큼 평범한 것도 별로 없다.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우리는 이미 지난 몇 시간 동안 소금과 상호 작용해왔다. 가죽, 도자기, 비누, 세제, 고무, 옷, 종이, 청소용품, 유리, 플라스틱, 의약품을 만드는 데 소금이 사용된다. 소금은 전 세계 수억 개의 카페와 레스토랑 테이블에 놓여있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보통 옆에 나란히 있는 후추와 달리 소금은 건강에 필수적이며 사람이 정착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항상 필수품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언어에 단맛과 짠맛을 구분하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소금은 음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요소이다. 눈이 쏟아지는 날 도로 곳곳에 뿌리는 것도 소금이다. 우리가 만드는 화학 제품의 절반 이상이 특정 단계에서 소금을 포함한다. 소금과 관련해서, 지구 표면의 70퍼센트를 덮고 있는 바다의 수조 톤의 물질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이렇게 소금은 어디에나 있다. 예수님의 비유모든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소금의 평범함은 예수님의 예화에 좋은 후보가 되게 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 관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상용품 사용을 즐겼으며,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마 5:13)으로 묘사하신 것이 가장 잘 알려진 예이다. 오늘날까지도 선하고 정직하며 겸손한 사람을 묘사할 때 이 표현을 쓴다. 의외이겠지만, 롤링 스톤즈의 노래, D. H. 로렌스의 시, 그리고 탈취제, 연수기, (당황스럽게도) 와인을 비롯한 흥미로운 다양한 제품의 이름에도 소금이 등장한다. 하지만 여기 정말 이상한 점이 있다. 예수님이 정작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른 사람들, 엄청나게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전히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소금이 의미하는 바를 배웠다. 그러니까 우리의 임무는 세상을 더 맛있게 만들고, 또 썩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설명은 종종 서로 충돌하고 그에 따라 다양한 문제를 야기한다. 예수님은 음식이 아니라 세상(땅)과 관련해서 소금을 언급했다. 땅에 소금을 뿌리는 건 원수를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시킨 후에 하는 일이다.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소금을 불과 연결할 뿐 아니라 또한 함께 평화롭게 사는 것과도 연관시킨다(막 9:49-50). 둘 다 맛이나 보존이라는 개념과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기술적으로 볼 때, 염화나트륨은 어떤 경우에도 맛을 잃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는 고대 세계에서 소금이 갖고 있던 다양한 목적 때문이다. 그 중 적어도 다섯 가지는 제자들을 향해 세상의 소금이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과 관련이 있다. 소금은 맛을 내고, 보존하고, 희생하고, 파괴하고, 또한 비옥하게 하는데 사용되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혼란스럽다는 가정 하에 예수님이 특히 염두에 두었던 소금의 특정 용도가 뭔지 토론하기보다는, 소금에 대한 모든 지식을 다 갖고 있었던 예수님이었기에 그의 은유가 여러 방식으로 다양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 예수님의 제자는 소금과 같다. 우리 또한 소금처럼 평범하고 어디에나 있고 또 우리가 눈치채건 아니건 이 세상 거의 모든 일에 관여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함에 따라 우리가 해야 할 역할도 다양해지기 마련이다. 소금의 다섯 가지 목적을 살펴보자.1. 맛내기소금은 밋밋한 음식(칩이나 감자튀김)에 풍미를 더하거나, 이미 존재하는 풍미(야채)를 강화하거나, 또는 전혀 다른 반대되는 맛을 제공함으로써(절인 카라멜), 음식의 맛을 더 좋게 만든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 대부분이 생각하는 소금의 용도일 것이다. 맛내기가 다섯 가지 소금의 용도 중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원래 청중들도 이런 사실을 먼저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맛내기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섬기는 방식에 대한 강력하고도 실제적인 사례이다. 우리는 전세계에 퍼져서 이 세계를 향상시키고, 밋밋한 것에 풍미를 더하고, 좋은 것으로부터는 축복을 이끌어 내고, 또한 구분되고 구별됨으로 대조를 제공한다. 바울이 우리를 향해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골 4:6)라고 말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게 바로 맛내기이다.2. 보존하기소금은 고대 시대 냉장고에 해당했다. 고기나 생선의 부패를 막기 위해서 소금을 문질렀고, 그럼으로 더 오래 보존할 수 있었다. 소금이 그토록 귀한 주된 이유였다. 로마 군인들은 때때로 소금으로 급여를 받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월급(salary)’ 이라는 단어의 기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이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 즉 세상의 선함을 보존하고, 부패하거나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는데, 이는 우리가 매일 아침 출근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다.소금은 단지 맛만 내는 게 아니다. 소금은 보존한다. 3. 희생하기희생이라는 측면은 덜 친숙하지만 앞에서 설명한 소금의 두 가지 기능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모세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여호와께 희생 번제를 바쳐야 하는지 설명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 2:13). 아마도 음식의 맛을 내고 고기가 상하지 않게 했기 때문에 소금은 모든 이스라엘의 희생 번제에 필요한 부분이었으며 심지어 그들과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기도 했다.따라서 피터 레이하르트(Peter Leithart)는 이렇게 말했다. “제자들도 이런 의미에서 소금이다. 이 세상은 제단이다. 인류와 세상은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의 큰 제물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순종하고 고통받는 자기 희생으로 스스로를 바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주 희생(cosmic sacrifice)의 조미료가 된다.”4. 파괴하기파괴는 훨씬 덜 매력적인 것으로 보이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다른 어떤 목적보다도 심판이나 멸망에 소금이 사용된다는 성경 구절이 더 많다.“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창 19:26). 또한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오실 날을 묘사할 때 언급하신 이야기이다 (눅 17:32).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면 그들의 땅이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에는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할 것”(신 29:23)이라고 경고한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고 했을 때, 세겜 사람들이 그에게 반역했고, 그는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는 것으로 응수했다(삿 9:45).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그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아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시며”(시 107:34)라고 묘사한다. 복음서에서 가장 맹렬한 심판의 구절 중 하나가 예수님의 바로 이 말씀이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9). 고대 근동에서 소금은 악에 대한 심판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다.제자들의 목적이 다 같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악을 심판하고 악을 멸하며 정욕이나 탐욕이나 살인이나 불의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소금맛 나는 그리스도인을 세상 속으로 흩어지게 하신다.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교회의 존재 자체가 원수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선포이고, 또한 바울이 말한 “멸망의 증거”(빌 1:28)의 역할을 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따를 때 우리가 만날 박해를 묘사한 바로 직후에 우리가 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종종 교회는 이런 식으로 살지 못한다. 악의 브레이크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세상의 악을 조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될 것까지도 다 알고 계셨다. 그렇기에 심판에 관한 그분의 말씀은 거의가 다 믿지 않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것이다. 우리도 소금에 절여져야 한다. 5. 비옥하게 하기몇몇 고대 문명에서는 토양을 위한 비료로 소금을 사용했다. 또한 조건에 따라 토양이 수분을 유지하고 밭을 갈기 쉽게 만들고 또한 식물을 위한 미네랄을 방출하고 잡초를 죽이고 질병으로부터 작물을 보호하고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서 소금이 필요했다. 이런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세상의 소금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살았던 환경이 시골이었기에 농경 문화가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비료이다. 우리는 조건이 어렵고 삶이 힘든 곳에 있어야 한다. 제자된 우리가 흩어질 때,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잡초를 죽이고,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성장을 촉진한다. 우리는 바로 이런 사명을 위해 보냄을 받았다. 생명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탄생한다. 척박한 땅이 열매를 맺는다. 선지자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구속될 때,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한다”(사 35:1).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미료, 보존제, 희생 제물, 파괴자 또는 비료로 사용하실 것이라는 의미일까? 한마디로 그렇다. 소금의 역할이 그중에서 오로지 한 가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의 말도 꼭 끝까지 들으라. 그러나 오늘 읽은 이 글을 기억하고 감안하면서 듣기를 바란다.원제: What Does It Really Mean to Be the Salt of the Ear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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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소금과빛
마태복음5:13
예수님의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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